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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각의 비밀 (프루스트 현상, 질병진단, 후각훈련)

by 하일노트 2026. 6. 19.

솔직히 저는 후각을 그렇게 대단한 감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코로나19에 걸려 냄새가 뚝 끊기기 전까지는요. 커피 향도, 비누 냄새도 사라진 며칠이 생각보다 훨씬 불편했습니다. 후각이 단순히 냄새를 맡는 기능을 넘어 기억, 감정, 심지어 질병 신호까지 담아내는 감각이라는 사실, 지금부터 같이 살펴보겠습니다.

냄새가 사라졌을 때 처음 알았습니다

코로나에 걸렸을 당시, 음식 맛이 밍밍해지면서 '아, 미각이 문제구나'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미각이 아니라 후각이 먼저 무너진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음식에서 느끼는 풍미의 대부분은 실제로 후각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입니다. 냄새가 없으니 맛도 없어진 셈이었죠.

코로나19가 후각을 빼앗는 원인은 후각 신경세포 자체가 아니라 이를 감싸고 지탱하는 지지세포(supporting cell)의 감염 때문입니다. 여기서 지지세포란 후각 신경세포 주변에서 구조적 지지와 영양 공급을 담당하는 세포로, 집으로 치면 기둥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이 기둥이 무너지면 집 전체가 흔들리듯 후각 기능 전체가 손상됩니다.

다행인 것은 후각 신경세포가 우리 몸에서 유일하게 평생 재생이 가능한 신경세포라는 점입니다. 공기 중에 직접 노출된 탓에 외부 바이러스나 이물질의 공격에 취약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재생 능력이 뛰어나도록 진화했습니다. 저 역시 2~3주 후 서서히 냄새가 돌아오는 것을 느꼈는데, 그 경험이 이 사실을 실감 나게 해주었습니다.

프루스트 현상, 비 오는 날 흙냄새가 어린 시절을 불러오는 이유

혹시 특정 냄새를 맡는 순간 오래된 기억이 갑자기 선명하게 떠오른 적 있으신가요? 저는 비 온 뒤 흙냄새를 맡을 때마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뛰어놀던 기억이 자동으로 재생됩니다. 어떤 향수 냄새를 맡으면 오래전에 헤어진 사람이 떠오르기도 하고요. 이걸 단순히 감성적인 경험으로만 여겼는데, 실제로 뇌과학적으로 설명이 됩니다.

이 현상을 프루스트 현상(Proustian memory)이라고 부릅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이 홍차에 적신 마들렌 한 조각으로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리는 장면에서 이름을 따왔습니다. 후각이 이렇게 기억을 강하게 자극하는 이유는 뇌의 정보 처리 경로에 있습니다.

시각이나 청각 정보는 뇌의 시상(thalamus)을 거쳐 처리됩니다. 여기서 시상이란 외부 감각 정보를 대뇌피질로 중계하는 뇌의 중앙 허브 역할을 하는 구조물입니다. 그런데 후각 정보는 이 시상을 거치지 않고 편도체(amygdala)로 직행합니다. 편도체는 공포, 호불호, 감정적 기억이 저장되는 곳으로, 쉽게 말해 감정의 뇌입니다. 중간 단계 없이 감정 중추에 직접 연결되기 때문에 후각은 다른 어떤 감각보다 빠르고 강렬하게 과거의 감정을 불러냅니다.

이 특성은 향기 마케팅에도 적극적으로 활용됩니다. 특정 공간에 고유의 시그니처 향을 입혀두면 그 향을 다시 맡을 때마다 고객이 그 장소와 연결된 긍정적 감정을 떠올리게 됩니다. 비누, 수건, 자동차 내부까지 향을 설계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냄새로 치매와 파킨슨병을 미리 알 수 있다

후각이 질병의 조기 신호가 될 수 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저는 이 부분이 이번 내용에서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단순히 '냄새 잘 맡는 능력' 정도로만 여겼던 후각이 신경퇴행성 질환의 경보 시스템이 된다는 것은 꽤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알츠하이머병(Alzheimer's disease) 환자는 100%, 파킨슨병(Parkinson's disease) 말기 환자는 90% 이상에서 후각 상실이 나타납니다. 여기서 알츠하이머병이란 뇌의 신경세포가 서서히 소멸하면서 기억력과 인지 기능이 저하되는 퇴행성 뇌 질환입니다. 주목할 점은 뇌가 본격적으로 손상되기 훨씬 전부터 후각 기능에 이상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디지스트 뇌과학과 문재일 교수 연구팀은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콧물에서 특정 단백질을 발견하여 치매를 조기에 예측하는 진단법 연구를 진행 중입니다.

영국에서는 한 간호사가 남편에게서 나는 독특한 머스크 향을 통해 병원 진단보다 8개월 앞서 파킨슨병을 알아낸 사례가 있었고, 이후 파킨슨병 환자들의 피지 냄새에서 공통된 패턴을 찾아내는 연구로 이어졌습니다.

아래와 같은 후각 이상이 지속된다면 신경과 진료를 받아보는 것이 좋습니다.

  • 땅콩버터 냄새를 전혀 맡지 못하는 경우
  • 레몬, 오렌지 등 시트러스(citrus) 계열 향을 식별하지 못하는 경우
  • 코로나19를 심하게 앓은 후 후각 이상이 지속되는 경우
  • 탄 냄새가 난다거나 없는 냄새가 느껴지는 후각 왜곡 증상이 나타나는 경우

물론 이 내용은 아직 연구가 진행 중인 단계이며, 위 증상이 있다고 해서 곧바로 치매나 파킨슨병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조기에 전문의와 상담하는 것이 좋다는 점에서 충분히 참고할 만한 신호입니다.

1조 개의 냄새를 구별하는 능력, 지금 쓰고 있나요?

사람의 후각이 개보다 훨씬 뒤떨어진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꼭 그렇지 않습니다. 개는 코 전체 면적이 후각 수용체(olfactory receptor)로 덮여 있어 공중의 분자 하나까지 감지할 수 있는 감도를 자랑합니다. 여기서 후각 수용체란 냄새 분자와 결합하여 전기 신호를 만들어 뇌로 전달하는 단백질입니다. 사람은 이 수용체가 코 안쪽 일부에만 몰려 있습니다.

하지만 냄새를 구별하고 분석하는 것은 수용체의 개수가 아니라 뇌의 처리 능력입니다. 인간의 코에는 약 400여 종의 후각 수용체 센서가 있는데, 색을 구별하는 시각 센서가 4종류에 불과한 것과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2014년 사이언스(Science) 지에 게재된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약 1조 개에 달하는 냄새를 구별할 수 있다고 추정됩니다(출처: Science).

흙냄새의 주성분인 지오스민(geosmin)은 올림픽 수영장 200개 분량의 물에 소금 한 알을 녹인 농도로도 감지가 가능합니다. 이 정도 예민함이면 개보다 못하다고 할 수 없겠죠. 다만 인간은 시각에서 워낙 많은 정보를 처리하다 보니 후각에 상대적으로 덜 의존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후각 훈련이 뇌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독일 연구팀에 따르면 장미, 유칼립투스, 시트러스, 클로브 등 네 가지 향을 규칙적으로 맡는 훈련이 인지 기능 저하를 늦추는 데 효과적이라고 보고했습니다(출처: Deutsche Alzheimer Gesellschaft). 조향사들이 하나의 냄새를 묘사하기 위해 50개 이상의 단어를 사용하는 훈련을 하듯, 후각은 의식적으로 단련할수록 더 정교해집니다.

후각이 이렇게 다양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매일 스쳐 지나던 냄새들이 조금 다르게 느껴집니다. 코로나 이후 후각을 되찾으면서 커피 향 한 모금이 그냥 향기가 아니라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것의 소중함처럼 느껴졌습니다. 앞으로는 좋아하는 향기와 행복한 순간을 의식적으로 연결해두는 것, 그리고 냄새가 달라졌다는 신호를 그냥 넘기지 않는 것, 이 두 가지만 챙겨도 충분히 의미 있는 시작이 될 것 같습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의료 조언이 아닙니다. 건강 이상이 의심될 경우 반드시 전문의와 상담하시기 바랍니다.


참고: 후각이 사라지면 몸에 어떤 일이 생길까? (feat. 문제일 교수) [취미는 과학/ 69화 확장판] : https://www.youtube.com/watch?v=9C16oD0dXYo&list=PLkKcqR2KGxgzqeKZo1Rx93kJFokuVkpye&index=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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