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두통이 심한 날이면 저는 그냥 조용히 가방에서 약을 꺼냈습니다. 티를 내봤자 "또 아프냐"는 반응이 돌아오는 걸 몇 번 겪고 나서 생긴 습관이었습니다. 특히 고등학교 때 편두통으로 조퇴를 했던 날, 겉으로는 멀쩡해 보인다는 이유로 선생님께 설명을 한참 해야 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최근에 통증의 과학적 구조를 다룬 내용을 접했을 때,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오래된 서러움에 이름이 붙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통증은 상처가 아니라 뇌가 만들어냅니다
통증이라고 하면 대부분 몸 어딘가가 찢어지거나 부러진 상태를 떠올립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겪어보니, 아무 데도 다친 곳 없이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픈 날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게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뇌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걸, 최근에야 제대로 이해하게 됐습니다.
통증을 정의하는 국제 학술 단체인 IASP(International Association for the Study of Pain)는 1979년 처음으로 통증의 공식 정의를 내렸고, 2020년에 이를 개정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조직 손상으로 설명되는"이라는 문구가 "그와 유사한"으로 바뀐 것입니다. 쉽게 말해, 검사에서 아무것도 안 나와도 실제로 아플 수 있다는 걸 과학계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기 시작한 겁니다. 이 변화가 저한테는 작은 위로처럼 들렸습니다.
통각(nociception)과 통증(pain)이 다르다는 것도 이번에 제대로 알게 됐습니다. 여기서 통각이란 피부나 근육에 퍼져 있는 통각 수용기(nociceptor)가 손상 신호를 감지해 척수를 통해 뇌로 전달하는 물리적 과정입니다. 반면 통증은 뇌가 그 신호를 받아 주관적으로 처리하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교통사고 직후에는 멀쩡한 것 같다가 집에 와서야 온몸이 쑤시는 경험, 많이들 해보셨을 겁니다. 그게 바로 통각은 이미 작동했지만 뇌가 통증으로 완성하는 시점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fMRI(기능적 자기공명영상) 연구를 통해 열 자극을 줄 때 뇌 활동이 실시간으로 변하는 것이 확인됩니다. 여기서 fMRI란 뇌 신경세포가 활동할 때 발생하는 혈류 변화와 산소 포화도 차이를 영상으로 포착하는 기술입니다. 이 기술로 보면 같은 통증에도 사람마다 뇌 반응 패턴이 전혀 다릅니다. 더 나아가 성별에 따라 통증 처리 메커니즘 자체가 달라진다는 연구 결과도 2015년에 발표됐습니다. 수컷 쥐에서만 작동하던 통증 기전이 암컷에서는 전혀 다른 면역 세포 경로를 통해 작동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겁니다.

뇌가소성과 플라시보, 통증을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통증이 뇌에서 완성된다는 말이, 거꾸로 뇌를 바꾸면 통증도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라는 게 처음에는 잘 와닿지 않았습니다.
노시플라스틱(nociplastic)이라는 개념이 여기서 중요합니다. 노시플라스틱이란 통각(nociceptive)과 가소성(plastic)을 합친 말로, 통증을 처리하는 신경계 시스템 자체가 변화하여 실제 조직 손상 없이도 통증을 느끼게 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만성통증 환자 상당수가 이 범주에 해당합니다. 뇌가소성(neuroplasticity), 즉 뇌가 경험에 따라 스스로 구조를 바꾸는 성질이 통증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반대 방향도 가능할까요. 제 경험상 이건 단순한 희망이 아닙니다. 목욕탕 열탕에 처음 들어갔을 때는 못 버틸 것 같던 뜨거움이, 몇 번 반복하고 나면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지는 경험이 그 증거입니다. 이게 학습에 의한 뇌 반응 변화, 즉 가소성의 작동입니다.
플라시보(placebo) 연구는 이 가능성을 더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2002년 국제 의학 저널 NEJM(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에 실린 연구에서는 관절염 환자를 세 그룹으로 나눠 실제 수술을 한 그룹과 절개만 하고 수술을 하지 않은 그룹의 결과가 동일하게 나왔습니다(출처: NEJM). 이 연구는 치료 행위 자체보다 "치료받고 있다"는 맥락과 기대가 뇌를 통해 실제 치료 효과를 만들어낸다는 걸 보여줍니다.
통증 바이오마커 연구
통증 바이오마커(pain biomarker) 연구도 주목할 만합니다. 통증 바이오마커란 뇌 활동 패턴을 분석해 개인이 실제로 얼마나 아픈지를 수치로 나타낼 수 있는 지표입니다. 집단 데이터를 활용한 모델은 상관계수 0.448 수준에 그쳤지만, 한 사람의 데이터만을 집중적으로 학습한 개인 맞춤형 모델은 0.787까지 올라갔습니다. 심리학·생물학 분야에서 이 수치는 매우 높은 편입니다(출처: 기초과학연구원). 같은 진단명을 받은 섬유근육통 환자 두 분의 뇌 마커가 완전히 달랐다는 결과도, 개인 맞춤형 접근이 왜 필요한지를 설명합니다.
통증을 이해하는 데 있어 지금 과학계가 주목하는 핵심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통증은 뇌가 완성하는 주관적 경험이며, 조직 손상이 없어도 실제로 발생할 수 있습니다.
- 노시플라스틱 통증은 통각 신호 없이도 신경계 변화만으로 만성화될 수 있습니다.
- 성별, 인종, 과거 경험(특히 차별 경험) 같은 사회적 요인이 통증 민감도에 영향을 미칩니다.
- 플라시보 효과는 뇌의 자가 치유 능력으로, 적절히 활용하면 치료 보조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 개인 맞춤형 통증 바이오마커 개발이 만성통증 진단의 객관화 가능성을 열고 있습니다.
만성통증이 전체 인구의 약 20%에서 나타난다는 통계는 생각보다 충격적이었습니다. 다섯 명 중 한 명 꼴입니다. 그리고 그분들 중 상당수가 검사에서 아무것도 안 나온다는 이유로 주변의 의심과 무이해 속에서 통증을 혼자 감당하고 있습니다. 제가 편두통으로 조퇴하던 날 겪었던 그 서러움이, 훨씬 더 심각한 형태로 매일 반복되고 있을 분들이 있다는 겁니다.
뇌가 통증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은 "그럼 마음 탓이냐"는 방향으로 가면 안 됩니다. 오히려 뇌가 정말로 아픔을 경험하고 있다는 증거가 이제는 fMRI 데이터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통증 바이오마커 연구가 임상 현장으로 이어지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만, 최소한 "검사에 안 나오면 안 아픈 것"이라는 인식이 바뀌는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의 일상이 달라질 수 있다고 봅니다. 아프다는 말이 증명 없이도 믿어지는 세상, 그게 이 연구들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방향인 것 같았습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의료 조언이 아닙니다. 통증으로 일상생활이 어려우신 경우에는 반드시 전문의와 상담하시길 권합니다.
참고: 원인 모를 만성 통증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통증의 비밀 (feat. 우충완 교수) [취미는 과학/ 54화 확장판] : https://www.youtube.com/watch?v=r4_8hhSumo8&list=PLkKcqR2KGxgzqeKZo1Rx93kJFokuVkpye&index=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