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생명이 어떻게 시작됐는지를 생물학이 아닌 화학으로 설명한다는 발상 자체가 저한테는 낯설었습니다. 평소 생명과학에 관심은 있었지만, 생명 이전의 세계를 화학 반응으로 추적한다는 접근은 처음 마주했을 때 꽤 충격적이었습니다. 번개 한 번에 아미노산이 만들어진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저도 황당하다고 생각했거든요.

화학적 진화, 생물학도 모르는 그 이전의 이야기
제가 직접 이 주제를 파고들어 보니, 생명의 기원을 이해하려면 생물학보다 먼저 화학의 문을 두드려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생명이 탄생한 이후의 변화는 진화생물학이 설명하지만, 그 출발점까지는 화학의 영역입니다. 이 과정을 화학적 진화(Chemical Evolution)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화학적 진화란 무생물 상태의 단순한 분자들이 화학 반응을 거쳐 점점 복잡한 유기물로 변해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이 개념이 얼마나 생소한지는 한국어로 된 관련 책이 단 한 권도 없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거의 1980년대 이후에나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으니 생물학보다도 어린 학문인 셈입니다. 제 경험상 이런 분야일수록 오히려 더 매력적인 이야기가 숨어 있더라고요. 답이 없으니 상상이 많아지고, 가설이 경쟁하면서 과학이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랄까요.
이 화학적 진화의 핵심 증거로 자주 언급되는 것이 유리-밀러 실험입니다. 1953년 스탠리 밀러와 해롤드 유리가 초기 지구 환경을 유리 장치 안에 재현하고 지속적으로 전기 방전을 가한 실험입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아무것도 없던 물 속에서 아미노산 13종류가 생성된 것이 확인됐고, 이후 더 정밀하게 재검증한 실험에서는 16종류 이상이 발견됐습니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아미노산이 총 20종류임을 감안하면 이 숫자가 얼마나 의미 있는지 느껴집니다.
생명체를 구성하는 핵심 재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핵산(DNA, RNA): 유전 정보를 저장하고 전달하는 설계도 역할
- 단백질: 세포 내 거의 모든 작업을 수행하는 일꾼
- 탄수화물: 에너지 공급과 세포 간 의사소통을 담당
- 지질: 세포막을 형성하여 내부 환경을 보호하는 경계막
RNA 세계 가설이 흥미로운 이유
이 부분을 공부하다가 제가 가장 흥미롭다고 느낀 지점은 RNA 세계 가설(RNA World Hypothesis)이었습니다. RNA 세계 가설이란 최초의 생명이 DNA나 단백질이 아닌 RNA 하나만으로 정보 저장과 화학 반응 촉매를 동시에 수행하던 시기가 있었을 것이라는 가설입니다.
현재 우리 세포는 DNA, RNA, 단백질이 분업하는 구조로 작동합니다. 이를 분자생물학의 중심 원리, 영어로는 센트럴 도그마(Central Dogma)라고 부릅니다. 센트럴 도그마란 DNA의 정보가 RNA로 전사되고, RNA의 정보가 단백질로 번역되는 일방향 정보 흐름의 원칙을 의미합니다. DNA는 설계도를 저장하고, mRNA는 그 정보를 공장으로 전달하며, 리보솜에서 tRNA와 rRNA가 협력해 단백질을 조립합니다.
그런데 RNA에는 한 가지 특별한 능력이 있습니다. 리보자임(Ribozyme)이 바로 그것입니다. 리보자임이란 RNA이면서 동시에 화학 반응을 촉진하는 효소 역할을 할 수 있는 분자를 말합니다. 이 특성 덕분에 RNA는 정보를 담으면서 스스로 복제를 촉진할 수 있습니다. DNA는 이 자가 복제를 혼자 할 수 없고, 단백질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RNA만이 두 역할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이 RNA가 생명의 출발점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의 근거입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오히려 생명이 꼭 복잡한 데서 시작될 필요가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장 단순한 분자 하나가 스스로를 복사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게 생명의 첫 발걸음이었을 수 있다는 거잖아요. 그 단순함이 오히려 더 설득력 있게 느껴졌습니다.
한편 RNA의 재료인 뉴클레오티드(Nucleotide)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도 흥미롭습니다. 뉴클레오티드란 핵산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로, 당·인산·염기의 세 요소가 결합된 분자입니다. 유력한 설명 중 하나가 시안화수소(HCN)를 통한 경로입니다. 초기 지구 대기의 수소, 메탄, 암모니아에 자외선이 닿으면 시안화수소가 생성되고, 이 물질이 핵산의 염기 성분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오존층이 없었으니 자외선 강도가 지금보다 수십 배 높았다는 점도 이 경로를 뒷받침합니다.

물, 그리고 최초의 세포가 만들어진 환경
제 경험상 과학적 사실을 공부할 때 가장 놓치기 쉬운 것이 맥락입니다. 아미노산이 생겼다, RNA가 복제됐다고 해도 이것들이 어디서 어떻게 모여 하나의 세포가 됐는지는 또 다른 문제니까요. 그 맥락을 이해하는 데 물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물은 비열이 극도로 높은 물질입니다. 비열이 높다는 것은 온도가 쉽게 오르내리지 않는다는 의미로, 화학 반응이 안정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합니다. 세포 내부의 정교한 생화학 반응들은 온도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이 완충 효과는 생명 유지에 핵심적입니다. 또한 물이 고체(얼음)가 되면 부피가 커져 액체 위에 뜨는 특성 덕분에, 표면이 얼어도 그 아래 액체 상태의 물이 유지되어 생명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출처: NASA 생명 탐사 연구).
그렇다면 최초의 지구에 이 물이 어디서 왔느냐는 질문도 흥미롭습니다. 최근 유력하게 논의되는 가설 중 하나는 지구 내부의 마그네슘 수화물 광석에서 물이 방출됐다는 설입니다. 마그네슘이 대기 중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며 지구를 냉각시키는 과정에서, 물을 품고 있던 광석이 온도가 내려가며 깨지면서 물이 지표로 솟아올랐다는 것입니다. 지구를 뒤덮을 만한 양의 물이 이 경로로 설명 가능하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는 가설입니다.
이렇게 물이 채워진 환경에서 유기물들이 농축되면 원시 수프(Primordial Soup) 상태가 됩니다. 원시 수프란 초기 지구의 얕고 따뜻한 바다나 웅덩이에 아미노산, 핵산 재료 등 유기물이 진하게 축적된 상태를 말합니다. 여기서 코아세르베이션(Coacervation)이라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코아세르베이션이란 용액 속 유기물들이 자발적으로 뭉쳐 막을 갖춘 동그란 방울, 즉 코아세르베이트를 형성하는 현상입니다. 이 주머니 안에 RNA 재료나 아미노산이 갇혀 반응을 시작했을 때, 그것이 최초의 세포 원형이 됐을 것이라는 것이 현재 가장 유력한 시나리오입니다.
명왕 누대가 끝난 약 40억 년 전 이후, 5억 년도 채 되지 않아 생명의 흔적이 나타난다는 사실은 이 과정이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됐음을 시사합니다. 실제로 39억 년 전으로 추정되는 생명 화석이 발견되면서 그 시점은 계속 앞당겨지고 있습니다(출처: Smithsonian Institution).
생명의 기원이라는 질문에 아직 확정된 답은 없습니다. 제가 이 주제를 파고들면서 느낀 건, 불확실성 자체가 이 분야의 매력이라는 점입니다. 가설들이 경쟁하고 새로운 실험이 기존 이론을 뒤집거나 보강하는 과정을 보면, 과학이 살아있다는 느낌이 납니다. 생명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생명이 시작되기 이전을 봐야 한다는 것, 그 시작점에 화학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나니 일상의 화학 반응 하나도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관심이 생기셨다면 유리-밀러 실험부터 검색해 보시길 권합니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가 거기서 시작됩니다.
참고: [취미는 과학/확장판] 19화 생명, 최초의 세포는 어떻게 나왔나? (feat. 장홍제 교수) :
https://www.youtube.com/watch?v=bBedhNmx-a4&list=PLkKcqR2KGxgzqeKZo1Rx93kJFokuVkpye&index=68